한화와 삼성, 라이벌이라 부르기엔 너무 복잡한 두 거인의 이야기
얼마 전 지인과 야구 이야기를 하다가 묘한 말을 들었습니다. “한화랑 삼성이 붙는 날이면 대전이고 대구고 경기장 분위기가 달라"라는 거였거든요. 처음엔 그냥 지역 라이벌 정도로 생각했는데, 파고 들어가 보니 이 두 이름이 엮인 역사가 야구장 바깥에서 훨씬 더 깊고 복잡하더라고요.
한화와 삼성. 이 두 그룹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한때 한 지붕 아래 살았던 형제가 각자의 길을 걸으며 결국 같은 시장에서 마주친 이야기"라고요.
같은 뿌리, 다른 줄기
많은 분들이 모르시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약은 1952년에 설립됐는데, 삼성이 이 회사의 지분을 보유하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한화 창업주 김종희 회장 사이에 사업적 교류가 있었고, 한국 재계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칼로 자르듯 그룹 간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두 그룹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삼성은 반도체와 전자로 글로벌 무대를 장악했고, 한화는 방산과 에너지를 축으로 묵직한 내실을 다졌죠. 서로 겹치는 영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경쟁이라고 부를 만한 접점이 사실 별로 없었습니다. 적어도 2010년대 중반까지는요.
분위기가 바뀐 건 한화가 삼성의 방산 계열사들을 인수하면서부터입니다. 2015년, 한화는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등을 한꺼번에 품에 안았거든요. 당시 재계에서는 “삼성이 왜 알짜 사업을 넘기느냐"는 의문과 함께 “한화가 체급을 한 단계 올렸다"는 평가가 동시에 나왔습니다. 삼성 입장에서는 그룹 구조조정의 일환이었고, 한화 입장에서는 방산 명가로 올라서는 결정적 한 수였던 셈이죠.
진짜 전쟁터는 따로 있다
요즘 한화 대 삼성 구도가 가장 뜨거운 곳은 사실 야구장이 아닙니다. 바로 태양광과 에너지 분야거든요. 한화솔루션은 태양광 셀과 모듈에서 글로벌 톱 클래스를 유지하고 있고, 삼성SDI는 배터리 기술로 에너지 전환 시대의 핵심 플레이어 자리를 꿰차고 있습니다. 둘 다 “미래 에너지"라는 같은 파이를 두고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는 건데, 시장에서는 이 둘의 행보를 끊임없이 비교하더라고요.
방산 쪽은 더 흥미롭습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K-방산 수출 붐을 타고 폴란드, 호주 등에서 대형 계약을 따내면서 주가가 폭등했잖아요. 한때 삼성 울타리 안에 있던 기술과 인력이 한화라는 이름 아래에서 전혀 다른 성과를 내고 있는 겁니다. 삼성에서 넘어온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간판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 몰랐다"는 말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우주 산업. 이건 아직 본격적인 대결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한화가 누리호 엔진 개발에 참여하고 삼성이 위성 통신 기술에 투자하면서 슬슬 같은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5년 뒤쯤이면 이 분야에서도 두 그룹의 이름이 나란히 오르내릴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야구장에서 시작된 감정의 역사
물론 일반 대중에게 “한화 대 삼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야구입니다.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 대전과 대구. 충청과 영남. 이 대결에는 단순한 스포츠 승부 이상의 감정이 실려 있거든요.
재미있는 건 이 라이벌 구도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1980년대 프로야구 초창기에 삼성은 강팀이었고 한화(당시 빙그레 이글스)는 중위권을 맴돌았습니다. 진짜 라이벌이라기보다는 팬들이 지역 감정과 맞물려 만들어낸 구도에 가까웠죠. 그런데 이게 수십 년 쌓이다 보니 이제는 양 팀 팬들 사이에서 진짜 라이벌리가 됐습니다. 감정이 역사를 만든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최근 몇 시즌은 한화 팬들에게 특별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오랜 암흑기를 거쳐 전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 삼성과 붙어도 기죽지 않는 경기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경기장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예전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의외인 게 있습니다. 기업 차원에서 보면 한화그룹과 삼성그룹의 관계가 반드시 적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거예요. 한화가 삼성 계열사를 인수한 것도 적대적 인수가 아니라 합의에 의한 매각이었고, 지금도 부품 공급이나 프로젝트 협력 차원에서 비즈니스 관계는 유지되고 있거든요. 야구장에서는 서로 으르렁거리지만 이사회에서는 악수하는, 좀 묘한 관계인 셈이죠.
결국 한화 대 삼성이라는 프레임은 보는 각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됩니다. 야구 팬에게는 피 끓는 더비 매치이고, 투자자에게는 방산과 에너지의 미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이며, 재계를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한국 대기업 구조조정의 성공 사례이기도 하죠.
다음에 한화와 삼성이 맞붙는 야구 경기를 보시게 된다면,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저 유니폼 뒤에 숨겨진 수조 원짜리 비즈니스 대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진행 중이라는 것. 과연 10년 뒤, 두 그룹 중 어느 쪽이 더 큰 판을 벌이고 있을까요?